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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치는 광장으로서의 큐레이팅 | 임경민


들어가는 말


하나의 전시에는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이 참여하게 마련입니다. 저마다 다른 맥락과 개성을 가진 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내는 것이 바로 큐레이터의 일인데요. 우리는 전시를 보면서 각각의 작품들을 만나지만, 이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는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JCC미술관의 임경민 선임큐레이터는 전시 기획을 하나의 ‘광장’이라고 표현합니다. 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가진 작가들이 오가면서 마주치는 곳, 그것이 바로 ‘광장’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듣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시간을 가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시가 작가의 작업을 단순히 큰 맥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오랜 고민과 함께, 임경민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함께 보실까요?


임경민 ©이채윤



밀도있는 경험의 현장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임경민 큐레이터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큐레이팅이 너무 재미있어서 끊지 못하고 애증의 작업을 계속해나가고 있는 JCC미술관 큐레이터 임경민이라고 합니다.


끊지 못하는 이 큐레이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던 시절에, 시작은 돈벌이를 위해서였어요. 지금은 없어진 Pre-국제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에서 전시 자료를 정리하던 일을 계기로, 그 일이 부산비엔날레로 이어지고 연이어 다른 전시와 기획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오게 되었네요.


이 분야에서 일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일이 일을 물고 들어오는 것 같아요. 전시가 미술 현장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다보니, 현장의 매력에 빠진 것이 큐레이팅 작업을 지속해 온 이유이기도 하고요.


현장의 매력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시의 현장은 실제로 모든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전시가 만들어지는 현장은 큐레이터, 코디네이터, 작가, 디자이너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것이 결국 하나의 전시로 완결되죠.


내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성취감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성취감을 계속 이 일에서 느끼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됐어요. 저는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공부를 할 때 느끼는 성취감과는 다른, 입체적으로 구성되어서 결국 하나의 완성으로 이르는 그 과정의 성취감에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돈벌이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풍족한 보상을 주거나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일이 아닌데도 이 일을 선택했던 것은, 이미 이 일을 좋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 일을 나 스스로 좋아한다고 처음 느꼈던 것이 바로 2008년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할 때였어요.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희열도 있지만, 또 전시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디테일의 매력들도 있죠.


그럼요. 국제전을 할 때의 매력이, 다양한 국적과 다른 성향을 띠는 작가들의 다양한 방식의 작품 설치 요구를 감지할 수 있는 포지션에 있다는 거예요. 이 과정의 차이는 완성된 전시만 보아서는 알 수 없거든요.


제가 코디네이터로 참여했을 때에도, 다른 국제팀의 코디네이터와 교류하면서 토론을 해보면 우리나라에서 매체를 접근하는 방식과 해외의 접근 방식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현대미술이 현장에서 발생하는 이런 생동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후에는 어떤 일들을 하게 되셨나요?


네. 독립기획자로 일을 하다가, 캔 파운데이션(CAN Foundation)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됐어요. 캔 파운데이션은 제가 자료나 논문 같은 것들을 수집하면서 업무를 같이 했던 선생님들과 연계되어서 일을 하게 된 곳이에요. 일종의 문화예술 사회적 기업인데, 하나의 사회적 기업이 할 수 있는 역량을 훨씬 넘어서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곳이었어요. 전시, 레지던시, 교육 사업을 모두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처음에 전시팀의 기획 파트로 들어갔다가, 전시팀장과 실장을 거치면서 일의 전반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다가 퇴사를 했어요. 캔 파운데이션에서는 베이징에서 연 전시, 서울 스페이스 캔과 오래된 집 전시, 레지던스 공모 등 많은 일들을 했었는데, 같은 일을 하더라도 5년 안에 에너지가 집약적으로 몰려있는 것과 적절한 간격 유지를 하는 것은 서로 에너지가 다르더라고요.


캔 파운데이션을 나와서 프리랜서로 일을 할 때, 비엔날레에서의 경험과 캔 파운데이션에서의 경험이 밀도가 높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 전시기획이라는 일의 가능성을 더 크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짧은 5년이라는 기간 안에 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험을 통해 더 높은 밀도의 작업이 가능성을 믿게 해주었죠.



왼쪽부터 지인, 몰라, 임경민 ©이채윤



작가를 ‘안다는’ 것


여러 프로젝트들을 거치면서 작가들도 많이 만나셨을 것 같습니다. 작가를 직접적으로 아는 것과 작가의 작품을 아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어요. 작가를 안다는 것은 작가의 과거 어느 지점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현재를 지나서 앞으로 무엇을 할 지 같은, 시간 흐름을 포함한 입체적인 관점이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작가들을 만나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도 있어요. 이전 작업들을 좋아했지만 새로운 작업들에 대해서 응원을 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현재의 작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울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작가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요. 당장 제가 작품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도 꾸준히 저에게 컨택을 해 오는 거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작가님이 한 분야에서 몇 년 씩 작업을 꾸준히 하시는 걸 보고 새롭게 이해되는 순간이 오기도 해요. 마치 영화에 나오는 복선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작가를 안다는 것은, 작업에 대한 외부의 평가에 상관하지 않고 작가가 내면적으로 작업을 완성시켜나가는 방법과 지향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지향까지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나 다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말씀을 듣다보니 이전에 하셨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프로젝트 생각이 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거기에 미술과 작가를 대하는 태도가 모두 녹아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간략하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사실 그 프로젝트는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 밀도있게 일했던 시간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 같은 거였어요. 캔 파운데이션에서 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좋은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제가 캔 파운데이션에서 일을 그만두고 나와서 만난 작가들에게서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기획자, 혹은 전시를 다양하게 구성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큐레이터는 기획의 컨셉과 맞는 작가의 특정한 작업을 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만날 때 작가가 그 작업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고 이후에 무엇을 향해 갈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만나기보다는, 전시라는 커다란 목표를 가지고 작품을 만나게 됩니다. 목적성이 강한 작업인 거죠.


그러다보니 작가는 작업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과 이후의 방향성, 작품에 대한 태도와 세계관 같은 것들을 큐레이터와 공유하기가 어려워요. 큐레이터에게는 원하는 것이 정해져 있고, 또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서 동시에 작가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모두 들어줄 수 없는 현실적인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일을 마치고 바깥에서 만난 작가들은 이러한 미술계의 현실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전시를 위해, 작품에 관심이 있어서 작가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근황에 관심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었으니까요.


만나서 작품 이야기를 하다보면, 작가님이 그 작품은 사실 이런 계기로 이렇게 마련이 되었고 그 이후에 작품이 어디에 설치되어있다, 그리고 그 작품에서 파생된 것들에 영향을 받아서 지금 어떤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시는데 이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일하는 동안에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거든요.


그러면서 ‘나는 전시를 만들어왔으면서 작가에 대해서 뭘 알고 있었던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큐레이터라는 일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돌아보게 된 거죠. 그런 차원에서 반성이 이루어지면서, 진짜 실컷 ‘이야기해보는’ 작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작가 분들에게 제안을 드린 것이 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였는데, 너무 흔쾌히 좋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기본적으로 6시간 동안 진행을 했는데, 처음에 들어왔다가 중간에 나갈 수는 있지만 중간에 입장할 수는 없어요.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모른 채로 맥락에 공감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작가는 그렇게 최소 3시간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저와 추가로 3시간을 더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작가들이 시간을 부담스러워했는데, 정해진 프로젝트도 아니니까 본인의 작업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느긋하게 말씀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순서도 상관없고, 느긋하게 아무 말이나 해도 되니까 자료만 가져오시라고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처음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2017년 그리고 2020년을 다해도 사정이 있으셨던 분 한 분을 빼고는 다 6시간을 넘기셨어요. 길게 얘기하신 분의 경우 하루에 다 안 끝나서 이틀에 걸쳐 18시간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고요. 이렇게 오래 할 수 있을지 저도 몰랐지만, 앉아서 온갖 이야기를 다 하면서 작가님들도 스스로 발견하시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 발견을 목격하는 것도 기뻤죠.


많은 작업들을 거치면서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셨을 것 같은데요. 단기간에 작가들을 깊게 아는 시간을 가지시게 되면서 작품을 보는 방식이나 미술을 대하는 방식에서 바뀐 것들이 있으셨는지요?


대하는 방식이나 기준이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아요. 다만 작가분들에게 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신 후에 마음대로 작업하시는 작가가 좋다고 말씀드리고 있어요. 제가 한 말을 유심히 듣고 거기에 방향성을 싣는 분들은 종종 자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처음에 제가 열정적으로, 진심을 다해 마음을 전했는데 그게 하나도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있었어요. 그때는 그게 서운했었는데, 시간을 두고 보니 이 작가님이 이미 그걸 소화하셨더라고요. 작가의 작품에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그 작가만의 방식으로 흐르고 있고, 그 부분은 특정 시점에 현실화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작가의 작업을 본다는 것은 이 작업이 작가의 모든 부분을 쏟아낸 어떤 완결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지점 혹은 미래의 어느 지점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찰나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작업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가 더 어렵다는 생각도 들어요.



임경민 ©이채윤



작가와 큐레이터의 관계


말씀을 듣고보니, 작가와 큐레이터의 관계는 공생관계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임경민 큐레이터님이 생각하시는 작가와 큐레이터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공생이라는 것은 같은 곳에 살면서 종이 다른 생물이 서로 의존하거나 도움받는 것을 의미할 텐데요. 저는 작가와 큐레이터는 물리적으로는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것을 경험해도 전혀 다른 이야기, 전혀 다른 경험치가 된다는 것이죠.


사람 수 만큼 다 다른 포지션이 있고, 그 포지션에서 경험한 다른 것들을 광장 같은 곳에 나와서 쏟아내는 거라고 봐요. 그리고 쏟아낸 다음에는 또 그 결과물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의 방식대로 파생을 하게 되고요. 결국 파생의 패턴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무언가를 내놓으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그런 공생관계라고 생각해요.


공생이라는 개념의 원래 의미가 서로에게 득이 되고 의존이 되는 것을 뜻한다면, 작가와 기획자의 공생관계는 광장에 터를 잡고 있는 기획자와 자기만의 세계와 경험을 가진 작가들이 광장에 그것들을 뱉어냄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죠.


물론 이 뱉어내는 과정에는 좋은 일도 있고 갈등도 있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이 파생되어 나오면 어느새 또 다른 광장이 형성돼요. 기획자들의 성향에 따라서 여러 가지 광장이 만들어질 것이고, 작가는 이 광장과 저 광장을 널뛰듯 오갈 수 있는 거죠. 서로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모르지만 무언가가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가 여기서 공생하는 관계, 그것이 작가와 큐레이터 사이의 관계인 것 같습니다.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광장 안에 그들을 엮어내셨을 텐데요. 어떤 특별한 방식이 있으셨는지요?


제 안에서도 여러 가지 광장이 존재해요. 수학에서 이야기하는 집합은 기준이 명확한 원소들의 모임이죠. 그런데 예술에서는 이 집합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요. 기준이 없다기보다, 기준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죠. 굉장히 유동적이고 쉽게 변화하는데, 이 변화의 가능성 자체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제 광장 안에서도 작가 분들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데, 작가들 사이에 흐르는 어떤 전류가 있어요. 다른 곳에서 만난 작가들인데 서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어서 거기서 레이어가 중첩되거든요. 그 레이어들에는 미묘한 기준들이 이미 만들어져 있어요. 그런 분들을 주로 만났던 것 같아요.


저는 에코톤(ecotone, 서로 다른 생태계 사이에 존재하는 전환 영역)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마찬가지로 경계 안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불안정한 상태로 있는 매력적인 작가들을 좋아해요. 이런 매력은 장르 같은 것을 다 뛰어넘어서,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만 알 수 있거든요.


저에게 여러 가지 광장이 있지만 그 광장을 아우르는 하나의 키워드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의 경계를 고민하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회예를 들면 회화를 하면서 전통적인 회화의 경계-형식과 주제적 측면 모두에서- 안에 나를 가두지 않기 위해서 현재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요.


결국 그래서 ‘당신은 회화 작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 다시 고민에 빠져드는, 상대적인 경계를 항상 고민하고 있는 작가들을 제가 흥미롭게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너무 확고한 분보다, 조금 흔들리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웃음)


혹시 해오셨던 작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꼽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캔 파운데이션에서 2009년에 시작한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라는 것이 있어요. 제가 그걸 이어받아서 2년 정도를 진행했었고요. 집이란 것이 사람이 사용하지 않으면 더 낡아지게 마련이거든요. 60년, 80년 된 낡은 집들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고, 여기서 무언가 해 보고 싶은 작가들을 모으는 공모를 올렸어요.


여름에는 ‘장마 프로젝트’, 겨울에는 ‘하우스 워밍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했는데, 이런 공간의 느낌을 잘 아는 작가 분들이 참여해주셨거든요. 오래된 집의 느낌이 겉으로 보면 침침한 것 같지만, 나중에는 공간이 작품을 입어서 성격과 온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공간을 이해하고 공간의 밀도를 조절하는 작업들을 보면서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하고 감탄을 했죠. 100호 크기가 3개 밖에 들어가지 않는 벽을, 물리적인 크기와 상관없이 그것보다 더 꽉 차보이게 만들 수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작가가 자기 작품이 가지고 있는 힘, 공간의 빈틈을 메우는 작품의 힘을 이해할 때 조화로워지는 것 같아요. 한 작가님이 저에게 나중에 이야기해 주신 것이, 전시 당시에 관람객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좌절했었는데 이후에 다른 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 전시 좋았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다는 거예요. 그렇게 전시를 보러왔다가 작가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들이 생겼고, ‘오래된 집’에 그런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임경민 ©이채윤



큐레이터의 역할과 ‘사회적’인 예술


그럼 이제 정리를 좀 해볼까 합니다. 임경민 큐레이터님께서 생각하는 큐레이터란 무엇인가요?


큐레이터란 직업이 아니라 역할인 것 같아요. 그래서 각 분야에 다 큐레이터가 있죠. 자기 분야에서 어떤 주제나 범주에 맞는 것들을 아울러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그것이 인식되도록 꾸러미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큐레이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일하는 영역에서는 큐레이터와 기획자가 동일한 사람일 때 전시의 밀도나 완성도 측면에서 더 편안한 흐름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죠. 기획을 시작할 때부터 큐레이팅의 방향을 고려하면서 기획을 할 수 있으니까 시간도 단축되고 소모적인 부분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기획자와 큐레이터가 나뉘어져 있을 때에는, 큐레이터라는 존재는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기획자와의 합도 맞춰나가야 하죠. 이 경우 큐레이터가 기획자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기획 의도를 실현하고, 그걸 조금 더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입체적인 사고와 공감 능력이 필요해요. 또 전시 환경을 면밀하게 이해하고,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관람자들의 관람 마인드까지도 추측해내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큐레이팅 작업에 있어서 지향하시는 방향성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기획 자체의 방향성은 아니지만 최근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작가와 사회의 관계랄까, 함께하는 방식의 방향에 관한 것인데요. 사회의 입장에서는 작가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고 싶어하고 동원하고 싶어하지만, 실질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죠.


어떤 사회적인 목적을 가진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도, 작가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의의를 행정적으로 서술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작가들이 어떤 ‘사회적인 활동’을 위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또 그런 목적을 가지고 참여한다면 이미 거기서 작업이 어그러지기가 쉬워요. 작가의 작업은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 아니니까 왜곡이 될 수밖에 없거든요.


이 고민은 캔 파운데이션에 있을 때부터 해온 고민이지만, 최근에 제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작업이나 작가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활동 자체가 사회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인데요.


요즘 이런 모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비영리’가 아닐 수 있을까? ‘비영리’는 이윤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너무 뚜렷하게 잡혀 있고, 이것 때문에 결국에는 이 ‘비영리’들이 힘이 빠져서 나가떨어지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미 그 안에 사회적인 구조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리적으로도 트렌디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그런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게 제가 요즘 가지고 있는 고민이에요.


JCC에서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전시를 위해서 저희가 점자책도 만들고 수어도 배워보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예전에는 수어라는 것은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만이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하다 여겼는데, 요즘 장애여부와 관계없이 수어로 대화를 하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굉장히 시끄러운 공간이거나, 떨어져 있는 경우에 말이죠.


수어나 점자는 다른 언어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장애의 표상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이해하고 접근하면 다양한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듯이 수어나 점자를 다중 언어로 교육과정에서 10년 동안 배운다면, 우리는 장애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더 많은 타인과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를 위한 사회적인 활동으로서 인식 개선에 도움을 주자, 이런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곳, 조용히 대화해야 하는 장소에서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힙한 언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거죠. 이런 생각의 변화를 통해 ‘우리 모두’를 상정하는 시선을 바꾸는 작업을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지를 요즘 고민하고 있어요.


사실 이 고민은 캔 파운데이션에서 일할 때부터 고민해왔던 부분인 것 같아요. 때때로 너무 작위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라고 요구받는 경우들이 있었죠. 캔 파운데이션은 그냥 순수하게 예술의 영역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사회적’ 기업으로서 어떤 메시지를 가지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서술하도록 요구받았어요.


그래서 그런 에너지를 차라리 오히려 상업적인 영역, 혹은 트렌디한 영역으로 풀어내면 훨씬 큰 동력을 만들어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이 아이디어가 허황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의 세대들이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여러 이유로) 과거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애’같은 개념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작가가 사회적 기능을 한다는 미명하에 동원되거나 작가에게 어떤 혜택을 주듯이 이런 것들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고 힙한데다 이윤까지 추구할 수 있는 작업으로 작가들이 자기화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그것을 사회라는 큰 광장에서 풀어낸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이런 것들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에 대한 쉽지 않은 고민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 마무리지을까 합니다. 앞으로 계속 준비하시는 전시에서도 말씀하셨던 부분들을 더 깊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경민 ©이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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