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다원예술’이라는 모호한 단어가 수년 째 예술계를 떠돌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퍼포먼스’가 예술의 역사 안에서 제법 긴 역사와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이 ‘다원예술’은 아직도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입니다.
박제언 큐레이터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의 큐레이터로서, 독립 큐레이터로서, 또 아이의 엄마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기획자입니다. 또한 그룹 도타비의 멤버로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요.
박제언님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다원예술’의 영역 안에서 발견한 가능성들이 흥미로운 예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인터뷰 함께 보실까요?

왼쪽부터 박제언, 몰라, 릳 ⓒ청두
다원예술과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올해 저희 <중심잡지>의 첫 인터뷰로 박제언 큐레이터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응해주셔서 감사하고요.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이하 플랫폼엘)의 선임 큐레이터 박제언입니다. 자기소개라는 게 항상 낯선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게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요.
저는 또 정체성이 많기도 하거든요. 제 SNS의 프로필을 보면 ‘큐레이터 : 미디어 아트, 페미니즘 아트, 에코-프렌들리 아트’라고 쓰여 있어요. 그 밑에는 플랫폼엘의 학예팀장, 그리고 도타비의 큐레이터라고도 되어있죠.
현재의 저는 직업적으로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의 학예팀장이자 선임 큐레이터로 있지만, 도타비(Dotavi)라는 이름의 다원예술그룹에서 큐레이터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스스로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정체성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지금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저희 학예팀 팀원이 한번은 저에게 “팀장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떤 거예요?”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해외 전시 수준의 커다란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지 않고 늘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이것 또한 직업 중의 하나로 같이 가져가게 되는 것 같거든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이제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여러 군데 어린이집을 ‘섭외’한 뒤 전화 연락을 돌리고 추첨을 빨리 해야 하죠. 이런 과정들이 지원서 쓰는 과정과 유사해요. (웃음) 그 중에서 ‘지원금을 준다는 기관’, 즉 들어와도 된다고 하는 어린이집을 보내게 되는 과정들이 전시의 진행과정과 정말 비슷한 것 같아요.
끝나지 않는 거대 프로젝트가 항상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라니, 확 와닿는 표현이네요. 그러면 플랫폼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는 언제부터 일하게 되셨던 건가요?
본격적으로 근무를 시작했던 건 2020년 4월부터입니다. 2019년 12월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던 <가능한 최선의 세계> 전시에서부터 시작을 했어요. 이 전시는 소설가 정지돈 작가와 시각예술 작가들이 협업을 해서 만든 전시로, 저는 이 전시도 일종의 다원예술이라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이후에는 오민 작가 개인전과, PLAP이라는 다원예술 공모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올해 5월 4일부터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아트 퍼니처, 오브제 디자이너의 작업을 ‘공생’이라는 주제로 엮어서 보여주는 <Unparasite>라는 전시를 기획 중에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같이 코로나라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 있어서, 힘든 시간을 함께 하셨던 것 같습니다. 박제언 큐레이터 개인으로는 뉴미디어, 혹은 다원예술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활동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플랫폼엘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먼저 그 전에 일했던 사비나 미술관에서 맡고 있었던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사비나 미술관에서 주로 담당했던 프로젝트는 모두 뉴미디어 아트와 관련되어 있어요.
하나는 아직 오픈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뉴미디어 아트와 관련된 프로젝트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뉴미디어 아트를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이었어요.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에서 사비나 미술관과 협력하여 진행된 프로젝트였는데, 사실 이들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기 전에도 저는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인 아트센터 나비에서 일을 처음 시작했던 만큼, 뉴미디어 아트에 늘 관심이 있었어요.
플랫폼엘에서도 권병준 작가의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와 같은 전시들을 보면 뉴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늘 있었고, 플랫폼엘의 총괄 디렉터이신 전상언 디렉터님은 예전에 미디어 아티스트였던 적도 있으시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시죠.
그런 주제적인 흐름이 있어서 관심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플랫폼엘에 오게 되었습니다.
플랫폼엘의 최대 장점은 젊은 디렉터인 것 같아요. 물론 저희 디렉터님이 기관장 중에서 젊으신 편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슈에 대해서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적은 편이세요. 정말로 열려있고,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디렉터님의 전공에 디자인도 베이스로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들까지 끌어들이시죠.

ⓒ청두
미디어, 페미니즘, 에코-프렌들리, 큐레이션
플랫폼엘에 올려지는 다양한 작업들에 관심이 계속 가더라고요. 혹시 플랫폼엘에 오시기 전에 하셨던 작업들, 주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석사논문을 뭉크에 대해서 썼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이 다들 놀라죠. 지금은 뉴미디어 ‘덕후’로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뉴미디어에 관심을 가지는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인터랙션’이거든요. 반응하고, 작품 안에서 제가 함께 숨쉴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인데요.
그런 측면에서 인터랙션이 굉장히 강한 회화 작품들이 있어요. 뭉크의 작품처럼 진솔한 자기 내면의 고백이 있는 작품들이 바로 그런 작품들이죠. 그런 회화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일종의 치유적 기능까지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제가 했었던 전시 중에 <So Please Listen And Just Hear Me(나의 이야기를 들어줘)>라는 전시가 있었어요. 영국 작가인 트레이시 에민의 회화 작품 하나를 메인에 두고, 거기에 증강현실과 인터랙션이 있는 작품들을 엮어서 자기고백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전시였어요.
트레이시 에민은 본인이 겪은 성적인 이슈들을 굉장히 솔직하게 자기고백적으로 풀어내는 작가인데, 그런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의 뉴미디어 여성 아티스트들의 VR, AR 작업을 꾸렸던 거죠.
이 전시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고 저 스스로에게도 중요한 전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제가 이 일에 뛰어들게 된 이유와도 같은데요. 제가 학부 졸업전시 때 만들었던 작품은 일종의 설치미술이었지만, 동시에 전시 같은 형태의 ‘무엇’이었어요.
<Loneliness>라는 이름이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을 전시하면서 공간 설계까지 같이 해버렸거든요. 다른 동기들이 작품 자체에 집중했다면, 저는 제 졸업작품이 보이는 방식에 집중을 했었던 것 같아요.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중요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그때부터 마인드가 큐레이터였네요. (웃음)
제 작업을 보기 위해 관객이 좁은 복도같은 공간을 걸어들어가고, 거기서 작품을 만났을 때 하얀 눈뭉치들 사이로 영상을 겨우겨우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어떤 분이 굉장히 긴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가신 거예요.
자기가 너무 속상했었는데, 작품을 보고 위로가 되어서 8분짜리 영상을 30분 넘게 혼자 보면서 울었다고. 그 작품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한계, 거기서 오는 외로움에 대해 연구하고 천착해서 만든 작품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느끼신게 아닐까 싶어요.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를 진행할 때 아이가 있었어요. 여성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우리가 공감하고 듣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전시 오프닝 때 제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관객 한 분이 다가오셨는데 제가 큐레이터라고 하니까 제 손을 잡고 우시는 거예요.
사실 거기에는 여성들이 마주해야 하는 일상의 많은 국면들, 다이어트, 메이크업과 꾸밈 노동부터 시작해서 성폭행, 여성살해, 여성인 어린아이들이 겪는 심각한 일들까지 다양한 것들이 있었기에 저는 그분이 어떤 부분에 공감을 했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 분이 제 손을 잡았던 그 순간이 느낌이 제가 이 일을 하기 정말 잘했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규모가 더 큰 전시들은 많이 있었죠. 그런데 그런 전시들보다 바로 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의 경험이 저에게는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저는 이걸 ‘초공감’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들 중 이런 공감을 뉴미디어 인터랙션을 넣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박제언 ⓒ청두
확고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다양한 확장을 일구다보면, 일이라는 것이 마냥 행복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닐 텐데요. 이런 활동들을 지속하기 위한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예전에 어떤 분과 나누었던 대화 중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예술 자체에 경험이 별로 없으신, 공학적인 마인드에서 살아오신 분과의 대화였는데. 그분이 공격적인 애티튜드로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테러리스트가 루브르 박물관에 폭탄을 설치해놓고 ‘네가 죽으면 이 폭탄을 터뜨리지 않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겠는가?”
예술의 가치가 그 정도냐는 질문이었죠.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테러리스트의 협박에 요구를 들어주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고요.
다만 이런 일화가 있죠, 세계 2차대전 때 그림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병사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림만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전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갔고, 그림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병사들이죠. 저는 그분들의 목숨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희생된 병사들이 구해낸 그림들 덕분에 살아난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도 생각해요. 실제로 예술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을 직접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요. 저는 예술의 힘을 늘 믿고 있고, 그래서 이런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예술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에코프렌들리와 같은 운동을 만들어내는 작품들과 결이 다른 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런 것들을 배제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많아요. 예술이 합목적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인데,‘현대미술의 악몽’이라는 말처럼, 그런 영역들 역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왼쪽부터 몰라, 릳, 박제언 ⓒ청두
다원예술그룹, 도타비
플랫폼엘의 큐레이터로도 일하고 계시지만, 다른 프로젝트도 함께 여럿 하고 계신데요. ‘도타비’라는 그룹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도타비는 적어도 저에게는,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가고 있는 팀이에요. 저희가 팀을 결성한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전부터 워낙에 친분을 가지고 있었어요.
‘다다’의 주 무대였던 카바레 볼테르라는 공간이 있었죠. 카바레 볼테르에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누구는 의상을 디자인하고 누구는 시를 읊으면서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냈어요. 그렇게 다다가 탄생했죠. 그런 걸 해보고 싶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다른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기가 사실 쉽지 않거든요.
저희 도타비의 멤버는 미디어아티스트 이혜주, 시각예술가 무아, 안무가 김민아, 그리고 큐레이터 박제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실 저희는 그룹의 정체성을 정리하는 걸 굉장히 두려워해요. 모두가 캐릭터가 굉장히 강해서 어떤 하나로 뭉치기 힘들거든요.
그런데 또 재미있는 건 저희가 가치관이나 베이스는 굉장히 비슷해서, 이런 저런 작업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의견이 비슷하게 모이게 되더라고요.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라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어요. 그분이 한국에 왔을 때 아티스트 토크에 갔었는데, 어떤 분이 ‘페미니즘 아트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을 했었어요.
그분의 대답은, “나는 페미니즘 아트를 하려고 한 게 아니고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이론가들이 그렇게 읽어준 것이다”였어요. 저희의 작업들도 어떤 방향을 가지고 가겠지만, 아마도 이건 저희의 정체성이 흘러가는 방향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원예술그룹으로서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 굉장히 많아요. 안무 작업을 하는 친구도 있고, 미디어 인스톨레이션이 가능한 미디어아티스트도 있어서 이제까지는 공연의 형태를 많이 띠고 있었죠.
대표적인 예가 제로원페스티벌에서 보여드렸던 <Break infinity Build>라는 작품이었고, 작년 말에는 서울문화재단 프로젝트로 <B infinity Leap : 고요한 도약>이라는 것도 했었어요. 유튜브를 활용한 증강현실을 시도했던 프로젝트였고요.
저희 멤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저희 그룹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제가 제일 말하고 싶은 것은 넷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에요. 네 명 모두 여성이기 때문에 뭉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여성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따라붙는 커다란 프로젝트가 있고, 이렇게 부여받는 2차적인 역할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기 프로젝트로 안고 가고자 하는 것이죠.
네 분이 처음에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어떤 뒤풀이 자리에서 네 명이 같이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재미있는 거 해볼까,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무작정 아무거나 만들기 시작했어요. 전시나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뭘 한 것이 아니라, 무료로 대여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빌려서 닥치는 대로 찍어봤죠.
한창 그렇게 놀다가 이게 너무 아까워서, 뭐라도 만들자고 해서 제안서를 만들고 여기저기 뿌리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건 그때 처음으로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 왔던 곳이 여기 플랫폼엘이었어요. (웃음) 그때 전상언 디렉터님을 처음 뵙게 되었고, 도타비의 이름으로 제안서를 보여드렸는데 똑 떨어지고 말았죠.
그게 아까 말씀드린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였어요. 호림아트센터에 입주해있던 프로라타(PRO/RATA)의 지원을 받아 트레이시 에민 작가의 작품을 빌릴 수 있었고 전시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전상언 디렉터님이 또 전시를 보러 오셨어요.

박제언 ⓒ청두
큐레이터의 역할과 다원예술의 가능성들
재미있는 인연이네요. 도타비는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협업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종의 ‘다원예술’일 텐데, ‘다원예술적’ 작업에 있어서 팀의 장점이나 혹은 유리한 것들이 있을까요?
다원예술을 영어로 하면 multi-disciplinary art가 되는데, 이 단어를 놓고 보면 장르 간의 협업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사실 다원예술의 의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장벽을 허물거나 낯선 것을 보여주는 작업들까지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거든요.
국가 기관에서 다원예술을 지원하기 위해 규정한 ‘다원예술’ 장르의 특성을 보면 예술형식의 실험, 탈장르, 복합장르, 매체융합, 문화다양성, 문화다원주의 등등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것들, 사실 다 다른 이야기거든요. 다원주의와 ‘장르 간 융합’이 다르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다원’과 다원예술의 다원은 또 의미가 달라요.
저는 미술사학과 출신이라 반드시 의미가 역사적으로 정의되고 정립된 용어만 사용해야한다고 배웠는데,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가까운 정의는 ‘장르 간의 융합’이 맞는 것 같아요. 이런 맥락에서 다원예술이 가지는 장점을 생각해보면, 그 전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당연했던 것들을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안무가, 시각예술가 친구들을 보면 그들은 비주얼디렉팅도 하고 무대미술 쪽으로도 일을 해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간은 또 다른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이더라고요. 결국 가장 큰 장점은 ‘전혀 낯선 것들을 시도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저희 어머니가 “장점과 단점은 연결된다”라는 말을 하셨어요. 여기서도 그러한데, 장르가 열리기 때문에 이해도가 낮아져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했지만 그것들이 어설프게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고,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아요.
여기서 도타비의 차별성은 큐레이터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큐레이터는 자기 전공이 없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나는 코딩도 할 줄 모르고 안무도 할 줄 모르고 공간 비주얼디렉팅도 못하지만, C언어도 공부했고 안무도 공부했고 기획서도 쓸 줄 알아요.
그러니까 기획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안무가가 “이렇게 증강을 만들어서 움직임을 따라다니도록 만들어주면 좋겠어”라는 의견을 내면 제가 불가능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끊을 수 있죠. ‘마커가 멈춰있어야 인식이 가능하므로 움직이는 상태에서 가능하게끔 하려면 컬러로 트래킹을 해야 한다’, 이런 부분들을 다 정리한 다음 미디어아티스트에게 전달하는 거죠.
큐레이터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네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정리가 되면 안무가와 미디어아티스트가 싸울 일이 별로 없어요. 조율을 해주는 중간자만 있다면 다원예술의 가능성이 무한히 확장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럴드 제만(Harald Szeemann) 이후로 큐레이터라는 존재가 엄청난 카리스마와 에너지를 가지고 전시를 이끌어 가는 대장 같은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고, 실제로 저 스스로도 그런 분들과 일을 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지향하는 큐레이터는 굉장히 만만한 사람이에요. 되게 만만해서 하고 싶은 말이나 의견을 다 들어주고, 쳐낼 땐 쳐내더라도 다른 색깔이 섞일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죠. 그게 제가 생각하는 큐레이터의 역할이에요.
다원예술을 다장르 간의 협업으로 본다면, 그것을 하나로 묶어내서 흐를 수 있게 해주는 조율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인터뷰를 슬슬 정리하는 의미에서,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요?
하고 싶은 것은 정말 많죠. 저는 노트를 하나 들고 다니면서 재미있거나 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 적어놓는 편이에요. 그래서 지금 묻혀있는 기획들이 많은데, 사실 그런 기획들을 실현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잡기보다는 멈추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한 아이의 엄마이자, 어떤 기관의 기획자이면서, 동시에 또 독립 기획을 하는 사람으로 살다보면 멈추고 싶은 순간들이 정말 많이 오거든요. 꼭 저처럼 이것저것 하지 않더라도 예술계 종사자라면 멈추고 싶은 순간이 언젠가 온다고 생각해요.
10년 전 동료들이 어느 순간 보면 로스쿨에 가 있고,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고, 그런 광경들이 보이거든요. 예전에는 저 스스로 뛰어나고 굉장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지만, 지금은 멈추지 않고 꾸준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인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커다란 것들, 의미가 있는 것들을 몇 차례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계속 가는 것이 목표가 되시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의 꾸준한 기획들도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청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