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공간, 전시를 넘나드는 기획들 | 박경린


중심. 큐레이션 | 중심잡지 x 박경린





들어가는 말


북창동, 오피스 지역이면서 동시에 서울의 아주 오래된 골목 한 구석에 ‘리플랫’이라는 전시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청 앞을 바쁘게 오가는 차들을 뒤로 하고 북창동 골목에 들어서면, 이곳이 어디였나 싶게 조용해지는 골목입니다.


이런 곳에 전시 공간 같은 게 있다고? 하며 반문하다가도 ‘리플랫’의 간판을 지나 공간에 들어서면 작고 깔끔한 분위기에 놀라게 됩니다. 이번 주에는 공간 ‘리플랫’을 운영하고 있는 박경린 큐레이터를 만나보았어요.


전시 기획, 공간 운영, 책 출판 등 영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박경린 큐레이터는 끊임없이 흥미로운 일들을 찾아나서고 있었습니다.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같이 가져갈 수 있었을까요? 인터뷰 함께 보시죠!




박경린 ⓒ오창동



다양한 전시를 오가는 기획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박경린 큐레이터와 함께 이야기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시 기획을 비롯해 출판이나 공간 운영 등 다양한 것들을 하고 계신데요. 먼저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박경린입니다. 전시와 책을 만들고, 케이스스터디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북창동에서 ‘리플랫’이라는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요. 큐레이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큐레이터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일을 하다보니 어느새 전시 기획자가 되어 있더라고요.


어렸을 때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 글을 잘 쓰는 것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르다는 걸 깨닫고 미술 대학으로 진학했어요. 이왕 대학교에 왔으니 모든 학부 수업을 다 들어보고 졸업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수업을 듣다가, 미술사 수업에 흥미가 생겨서 부전공을 하고 나중에는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되었죠.


학부 때 미술사 수업을 들으면서 친해졌던 선배들이 많아서 막연하게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을 하겠구나 싶었고, 막상 회사를 다녀보니 체질에 안 맞더라고요. 대학 졸업 후 축제, 전시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배웠죠.


대학원에서는 예술학을 전공했고 졸업하던 해에 아르코에서 지원하는 신진 큐레이터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때 아트인컬쳐 뉴비전 신진 평론가 공모에 파이널 3인으로 선정되었던 것이 결정적인 계기라면 계기가 된 것 같아요.


1등은 못 했지만 잡지에 실린 비평글을 보고 연락을 준 작가분들도 계셨고, 주변의 전시 공간을 운영하는 분들이 젊은 비평가가 필요하다며 작가들을 연결시켜 주거나 전시 기획을 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셨거든요. 그 뒤로 전시 기획자, 혹은 미술과 관련하여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박경린 ⓒ오창동



하셨던 프로젝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을 소개해주신다면요?


저는 현대미술과 공예 분야를 주로 다루는 전시 기획자로 스스로를 소개하지만, 사실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많아서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다는 것이 저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프로젝트를 꼽기가 애매하기는 한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했던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일 것 같아요. 전시는 2015년에 진행되었는데 2013년부터 1년을 넘게 준비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G-Dragon과 한국의 젊은 현대 작가들을 외국에 소개하기 위한 취지로 작은 부분까지 함께 고민하고 기획했던 전시라 생각이 많이 나네요.


이때 해외 작품 구매부터 커미션 작품 제작, 아트 상품 제작 및 판매, 한국 및 외국 미술관 전시 대관 및 공동 기획 계약까지 다양한 종류의 계약서를 다루고 진행하면서 추후 진행하는 일들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죠.


무엇보다 시대의 아이콘과 함께 긴 시간 호흡하며 기획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 않은 일이니까, 여러 가지로 몸과 마음이 힘들기도 했지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G-Dragon과 함께 한 전시가 열린 해 겨울, 문화체육관광부와 공예문화디자인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공예트렌드페어 10주년 <손에 담긴 미래>의 주제관 전시 감독으로 선정되었던 것이 경력상으로는 도약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보편화되었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3D 프린팅과 한국 공예의 만남을 다룬 전시였는데, 시의성이 있고 영상, 사운드, 프로젝션 맵핑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해당 전시를 해외에 소개하는 버전으로 <움직임을 만드는 사물>을 기획하여 영국과 홍콩에서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는데요. 세계 최대, 최고의 장식 박물관인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에서 제가 기획한 전시의 작품들이 다수 소장되어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웃음)



공간 ‘리플랫’ ⓒ오창동




조용한 북창동의 공간, ‘리플랫’


이렇게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면서, 또 현재는 북창동에 ‘리플랫’이라는 공간을 운영 중이기도 하신데요. 원래는 을지로에 있던 공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되셨나요?


약 10여년 동안 독립 큐레이터이자 기획자로 활동해왔어요. 기업이나 기관에서 큰 규모의 기획전을 할 때 불러주시는 일이 많다보니, 뭔가 제 의지대로 오롯이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당시 만들고 있었던 사물학 잡지인 <핑거프린트>의 후원이 어려워지면서 잠정적으로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 함께 했던 팀원들이 좋아서 계속 같이 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게 되었죠. 그래서 <슈퍼마켓>이라는 잡지도 창간하게 되었고요.


전시 기획을 주로 할 때에는 굳이 회사라는 형태가 필요없었는데, 막상 책을 만들려고 보니 출판사 신고도 해야 하고, 출판사 신고를 하려면 회사가 있어야 하고, 이것 저것 필요한 게 많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마침 을지로에 작가 후원용으로 공간을 빌려놓고 있던 회사에서 전시장과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거죠.


을지로의 많은 공간들이 그렇지만, ‘리플랫’이 처음 있었던 곳은 을지로 큰 길가에 있어서 접근성이 굉장히 좋았는데, 또 계단을 들어서서 꼬불거리는 미로같은 길을 따라가다보면 전시장이 나타난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와 보시고서 ‘도둑놈 소굴 같다’고 표현하셨는데, 이 ‘도둑놈 소굴 같은’ 곳을 지나면 아늑한 곳이 나온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죠. 여기에 보물 같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의외의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단이 좁아서 평면 작업 외에는 들어오기가 힘들다는 점이 있었는데, 설치 미술이 주를 이루는 동시대 미술에서 오롯이 회화나 사진, 판화나 일러스트 등 평면에서 일어나는 조형적 실험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현대미술의 틀에서 규정되지 않는, 현대미술과 또 다른 무엇의 경계에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고자 하고 있어요. 미술계는 어떻게 보면 경계가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 어떤 곳보다 견고한 성채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거든요. 그런 보이지 않는 경계같은 것들을 조금씩 풀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박경린 ⓒ오창동



을지로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묘한 매력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북창동으로 이사오게 된 건 어떤 것 때문이었나요?


작지만 알차게 전시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는데, 저희가 자리잡고 있었던 건물이 팔렸어요. 올 한 해 전시 계획이 모두 예정되어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닥쳐서 걱정을 너무 많이 했죠. 을지로의 변화하는 모습을 그 안에서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계속 을지로에 남아있고 싶었는데 저희에게 맞는 공간이 안 나타나더라고요.


충무로 일대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원하는 공간이 없어서 인연이 없나보다, 하고 마음을 비웠는데, 중개업소에서 시청 쪽에 괜찮은 공간이 있다고 소개를 시켜 줬어요. 한번 보고 나왔는데 여긴 갈수록 계속 기억이 나더라고요. 을지로에 없었던 ‘세면대가 있는 화장실(!)’이 있는 것도 좋았고 말이죠.


그렇게 북창동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오래된 골목의 느낌이 남아있으면서도 조금만 걸어나가면 서울의 중심에 서게 돼요. 기분이 제법 좋죠. 을지로의 바쁘고 복잡한 소란스러움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북창동의 조용한 환경도 좋은 전시 공간의 요소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리플랫’은 대관을 하지 않고 기획전시만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전시들이 있었나요?


저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재미있는 작가들과 새로운 인연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대관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 공간과 전시 공간이 같이 있는 곳이라 전시를 여는 동안 업무에 오롯이 집중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요.


이옥토, 오디너리피플, 최지수(갯강구), 존쿡(김성국+김시종)과 같은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해왔습니다. 작가 선정 기준은 거창한 것은 없고, 저희가 모두 좋아하는 사진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작가들입니다.


이미지 속에 궁금한 이야기가 숨어있거나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밌다거나 저희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녹아있는 작가들이었어요. 또 같이 새로운 작업을 도전해볼 마음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제까지는 첫 개인전을 하는 사람을 선정해왔습니다.



공간 ‘리플랫’ 입구 ⓒ오창동




흥미로운 것들 사이에서 조율하기


재미있는 전시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시와 더불어 작가와 협의하여 굿즈를 기획하고 셀링한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것 때문에 굿즈 기획을 하게 되셨나요?


전시를 오래 해오면서 무엇보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쉽고 편하게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이었어요. 제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국내에는 아트 상품도 그리 다양하지가 않았었거든요.


누구나 작품을 쉽게 소유하고 즐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재는 작가들이 기업이나 기관들에서 지원해주는 지원금이나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각자의 재능만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보고 싶었던 것이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전시 공간도 말하자면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지원금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현재의 구조 속에서 지원금 없이 지속가능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어요. 또 텀블벅을 통해서 진행하면 해당 작가나 현대미술 자체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확실히 작품을 직접 소유하는 건 드문 기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간 운영 이외에 진행하고 계시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우선 전시 공간 ‘리플랫’은 회사 케이스스터디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12년 가까이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해오다가 2018년에 <핑거프린트>를 같이 만들었던 에디터와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독립 큐레이터로 일하면서는 정말 다양한 공공기관이나 기업과 일을 했고,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공예 분야, 또 경영 마케팅이나 엔터테인먼트,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전시를 만들었어요. 이런 데에서 얻은 것들을 강점으로 삼아 전시뿐만 아니라 콘텐츠 기획이나 문화 프로그램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케이스스터디에서는 다양한 출판물들을 만들고 있는데, 외부에서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들도 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소비 습관에서 문화를 들여다보는 <슈퍼마켓> 시리즈처럼 저희가 만들고 싶었던 콘텐츠들 역시 꾸준히 만들고 있습니다.


전시는 말하자면 일시적인 이벤트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가끔은 아이디어나 체력이 고갈되면서 지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책을 만드는 과정은 물리적인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매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거기에 책을 만들면서 새로운 것들을 싣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점은 숨겨진 장점이고요.



존 쿡 개인전 전시 전경 ⓒ오창동



다양한 일들을 해오셨는데, 프로젝트 각각이 저마다 흥미로운 지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시 공간을 운영해나가고 싶고, 또 큐레이터로서의 지향점은 어떤 것인가요?


케이스스터디는 전시와 출판을 모두 진행하는데, 자체 기획 프로젝트들도 많지만 클라이언트가 지향하는 바에 맞추어 저희의 상상력을 보태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독립 큐레이터로 혼자 활동할 때에는 밀린 일들이 많아서 제가 하고 싶었던 전시 기획을 하거나 작가들과 대화할 기회나 시간이 부족했는데, 회사를 만들면서 그런 것들을 조금씩 실현해나가는 중이에요.


기획이라는 건 사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케이스스터디 팀원들과 함께 그런 일들을 만들어나가고자 합니다. 장르적으로는 미술이나 디자인 등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찾아서 응원하고 싶고요.


올해는 팬데믹에 공간 이전까지 겹쳐서 많은 전시를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2021년부터는 보다 많은 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니 많은 분들이 관심가지고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전시와 책을 만들고, 그 일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정말 좋아요. 케이스스터디 팀원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고, 재능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또 케이스스터디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 시대에서 가장 멋진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과 오래오래 같이 일하면서, 함께 일했을 때 즐겁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큐레이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넓은 영역에서 더 재미있는 활동 보여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박경린 ⓒ오창동





박경린(큐레이터) 전시를 만들고 책을 만든다. 케이스스터디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케이스스터디의 팀원들과 함께 전시공간 ‘리플랫’을 운영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만나는 슈퍼마켓을 통해 그 나라 사람들의 사람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워 <슈퍼마켓> 시리즈를 책으로 만들고 있다. 미술을 통해 미술을 넘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