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림동 거리 <을지판타지아 : Daydream> ⓒ류지영
낮의 을지로는 철공소와 인쇄소가 돌아가는 매우 뜨거운 곳입니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대로변 너머,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을지로의 골목들은 선선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심산업의 열기로 가득차 있는 곳이지요.
이런 을지로 골목들은 해가 지면 전혀 다른 곳으로 변모합니다. 철공소의 불이 하나 둘 꺼지고 뜨거운 하루의 노동을 마친 사장님들이 퇴근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골목은 고요해지고, 떨어지는 가로등 사이를 거니는 것은 우아한 길고양이들 뿐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수도 서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던 도심산업의 현장 을지로는 2020년에도 그 시절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골목의 낮과 밤은 이곳에서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만큼이나 아이러니하고, 또 기묘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 시간과 공간, 혼재되어 있는 장소성을 고민하는 전시들이 꾸려졌습니다. 고요해진 밤의 을지로에 빛을 불러오는 <을지판타지아 : Daydream>, 다시 조명받고 있는 을지로의 장소성과 정체성을 고민하는 <을지 드라마>, 아주 오랜 옛날 숲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지명 산림(山林)동의 산수를 되살리는 <을지산수>, 이 세 개의 전시들이 <을지판타지아>라는 이름으로 을지로에 펼쳐졌습니다. 을지로 골목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같이 보실까요?

산림동 거리 <을지판타지아 : Daydream> ⓒ류지영
한 여름밤의 꿈, <을지판타지아 : Daydream>
을지로 산림동 일대는 철공소가 밀집되어있는 지역입니다. 낮에는 금속 자재와 가공된 철제품들이 골목을 분주히 오가고, 철을 썰고 연마하는 소리들로 가득한 곳이에요. 을지로 그 어느 곳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산업의 중심지죠.
그런데 해가 지면 이곳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먼저 철공소의 사장님들이 가게를 정리하고 셔터를 내리면, 을지로 골목이 셔터 위에 그려진 벽화들로 가득 채워져요.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벽화 작업으로 골목이 마치 갤러리처럼 변하죠.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이제 인적이 없는 거리는 고요함에 잠깁니다. 뜨거운 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고, 낮의 활기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을지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을지판타지아 : Daydream>은 바로 이런 을지로 골목의 모습에서 착안한 전시입니다.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빛이 사라져버리고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는 이곳이야 말로, 화려하게 빛나는 미디어아트들이 자리잡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될 수 있으니까요.

산림동 거리 <을지판타지아 : Daydream> ⓒ류지영
작년 <을지로 판타지아>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던 축제는 올해 <을지판타지아 : Daydream>이라는 이름으로 산림동 골목을 메웠어요. ‘백일몽’이라는 부제는 10월 17일 어두운 을지로 골목에서 하룻밤 반짝하고 불타올랐다가 사라지는, 마치 한여름밤의 꿈 같은 미디어아트 전시를 의미하는 제목이라고 합니다.
단 하룻밤 개최되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을지로에 산림동에 오셨더라고요. 북적북적한 입구에는 밤의 을지로를 보기 위해 몰린 관람객들이 코로나 방역을 위한 체크리스트 작성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어요.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골목골목 셔터에 그려진 벽화들 위로 전시되고 있는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산림동 거리 <을지판타지아 : Daydream> ⓒ류지영
작품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되었습니다. 어떤 작품은 빛을 이용해서 벽과 셔터 위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의 궤적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프로젝터를 이용해 영상을 뿌리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관람객들은 리플렛에 그려진 맵을 보고 자유롭게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감상할 수 있었죠.
작품들은 어두운 골목 안에서 ‘빛’을 이용한 작품임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많은 작품들이 을지로와 이곳의 산업을 고민하는 주제들을 품고 있기도 했습니다. 을지로의 일상을 상상하여 재구성하기도 하고(김수희), 사운드맵핑을 통해 철공소과 기계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며(김파도), 의인화된 건축물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벗겨내면서 을지로의 진짜 모습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성지은&송상은).

산림동 거리 <을지판타지아 : Daydream> ⓒ류지영
지금 여기의 을지로, <을지드라마>와 <을지산수>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 깜빡이는 이정표처럼 설치된 작품들을 지나다보면, 을지로 산림동 한 가운데에 위치한 을지예술센터 건물에 도착하게 됩니다. 을지예술센터 건물에서는 을지로의 지금을 되돌아보는 <을지드라마>와 산림동 일대 곳곳 건물 외벽에 설치된 <을지산수> 작품들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을지로는 오랜 시간 도심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아왔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서울의 최중심부에 고층건물이 하나 둘 들어설 때에도, 여전히 철공소와 인쇄소가 변함없이 돌아가는 산업의 터전이었죠. 그렇게 묵묵히 일해오던 을지로가 어느덧 갑자기 ‘힙한’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을지로는 과연 어떤 곳이길래, 무엇이길래 이런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요? <을지드라마>는 이런 맥락에서 ‘진짜 을지로’가 무엇인지, 그 리얼리티에 대해 되돌아보는 전시입니다. 철공소 골목 한가운데에서 을지로를 가로지르는 현상들을 바라보는 을지의 내부이자 외부, <을지드라마>를 함께 보실까요?

을지예술센터 <을지드라마> ⓒ이유준
을지예술센터의 입구를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미디어작품들을 한참 따라가다 골목 속 비밀기지처럼 숨겨져 있는 을지예술센터 입구에 도착하면, 바닥에 푸른색으로 새겨진 을지예술센터의 로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로고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본격적인 전시가 시작됩니다.
<을지드라마>는 을지예술센터는 작지 않은 공간을 꼼꼼히 활용하여 11개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도슨트의 안내를 받으며 각각의 작품들이 어떤 의도로 제작되었고 어떤 메세지를 제시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을지예술센터 <을지드라마> ⓒ이유준
작품은 전시공간의 내외를 가리지 않고 설치되었어요. 건물의 3층과 4층을 모두 사용하는 <을지드라마>는, 입구에 계단을 오르며 만날 수 있는 박슬기 작가의 작품으로 시작해 4층 꼭대기 공간 엄아롱 작가의 작품까지 쉬지 않고 펼쳐집니다.
각각의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놀이와 모방을 통해 가짜와 진짜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진기종)이나, ‘레트로’의 컨셉을 차용해서 상상의 구도로 펼쳐지는 가족사진을 구현하는 작품(글래머샷), 우라늄 목걸이를 착용함으로써 죽음을 ‘체험’하는 작품(송호준)들은 모두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 무엇을 넘나들고 있는지 질문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을지예술센터 <을지드라마> ⓒ이유준
을지예술센터를 오르내리며 <을지드라마>를 감상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면, 탁 트인 산림동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산림동 곳곳에 설치된 <을지산수>의 작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림동의 오래된 건물들은 밤이 되면 조용히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시간이 쌓인 건물들의 외벽은 낡거나 바랬지만, 낮의 따가운 햇빛이 드러내던 앙상함이 어둠 속에 잠기면 건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 되거든요. <을지산수>는 이렇게 도심이면서 도심이 아닌, 오래된 을지로의 골목을 하나의 풍경이자 산수로 바라보는 전시입니다.

을지예술센터 <을지산수> ⓒ이유준
을지로는 어떤 풍경을 가지고 있을까요? 무채색이 가득한 건물의 지붕에는 보통 방수포들이 덮여있습니다. 높은 건물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 이 기묘한 공간의 풍경을 전시장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을지산수>는 이런 생각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붕과 외벽을 작품으로 덮고, 조명과 프로젝터를 활용해 작품을 드러냅니다. 관람객들은 산림동 거리를 지나가 문득 올려다본 건물에서 작품을 발견할 수도 있고, 을지예술센터에 전시를 관람하러 들렀다가 <을지산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을지예술센터 <을지산수> ⓒ류지영
도시와 예술은 다양한 방법으로 관계맺습니다. 삶과 예술이 그러하듯, 예술은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가장 깊은 곳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죠. 도시적 삶의 양식 안에서 모든 것들이 단지 소비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가 진짜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리곤 합니다.
<을지산수>는 도시의 풍경 위에 다른 레이어를 입힘으로써, 마치 가상현실 같은 풍경을 마주하고 우리 일상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끔 했습니다. 평소에 저런 곳에 존재하리라 상상하지 못했던 회화들이 풍경으로 드러나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상력으로 거리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을지예술센터 <을지산수> ⓒ류지영
을지로에서 펼쳐진, 그리고 아직도 펼쳐지고 있는 전시들은 산림동 철공소 골목을 전혀 다른 어떤 곳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땀흘리며 일하는 일터가 어둡고 고요한 비(非)장소가 되었다가, 빛과 소리의 작품을 만나 전혀 다른 시공간이 되기도 하고, 전시장 안과 밖을 지나면서 지금을 깜빡 잊게하거나/지금 여기를 다시 찾아오기도 합니다.
산업단지 을지로, ‘힙한’ 을지로, 우리가 알고 체험하고 있는 을지로의 모습은 진짜 을지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그러하듯, 을지로는 지금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바람과 욕망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우리가 을지로의 모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을지로의 ‘한여름밤의 꿈’을 통해 잠깐 엿보았던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죠.
미디어아트가 가득한 <을지판타지아 : Daydream>은 10월 18일로 모두 종료되었지만, 을지로 산림동과 을지예술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을지드라마>와 <을지산수>는 11월 14일까지 계속됩니다. 을지로의 골목이 보여주는 지금의 시간들을 천천히 곱씹어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