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낙원상가는 서울의 가장 오래된 주상복합건물 중 하나입니다. 악기상가로 잘 알려진 이곳은 서울의 근대화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주상복합건물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죠. 을지로와 가깝기도 하고, 세운상가라는 을지로의 상징적인 건물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여러모로 친숙한데요.
이번 주는 이 낙원상가의 전시공간 d/p를 운영하고 있는 이민지 큐레이터를 만나보았습니다. 낙원상가라는 공간에 전시공간을 만들게 된 연유와, d/p에서 기획되고 있는 기획자 공모 등 d/p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그리고 낙원상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시간성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낙원상가와, 그곳에 있는 d/p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까요? 예술과 전시는 어떤 맥락에서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는 이민지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시죠!

이민지 ⓒ오창동
낙원상가의 공간 d/p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먼저 간략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낙원상가에 있는 전시공간 d/p를 운영하고 있는 이민지 큐레이터라고 합니다. d/p는 2018년 4월에 오픈한 공간이에요. 그 전에는 잡지사의 에디터로 있다가, 제주 비엔날레에서 일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맨 처음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독립으로 활동했을 때 만들었던 프로젝트는 ‘예술과 생명연장’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였어요. 두 해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예술이 무엇이고 누구를 예술가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프로그램이었죠.
이런 저런 프로그램들을 하다가 전시 자체에 궁금증이 생겨서 박물관과 관련된 작업들을 하기도 했었어요. 그러다 잡지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 지금 d/p를 공동 운영하고 있는 김지연 디렉터님과 함께 제주비엔날레 큐레토리얼 팀에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해오셨는데, 아무래도 최근 활동의 중심은 이곳 d/p일 것 같습니다. d/p라는 공간은 어떻게 만들게되셨고, d/p는 어떤 의미인가요?
2015년 즈음에 김지연 디렉터님이 세계문자심포지아에서 익선동과 낙원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어요. 그러면서 예술가들이 낙원상가 등지에서 오가고 발견하는 것들에 대해 조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낙원상가는 서울의 상징적인 건축물이기는 하지만, 사실 서울시 소유가 아니에요. 소유주가 제각기 나뉘어져있는 사유재산이거든요. 50년 전 낙원상가를 처음 지었던 대일건설이 낙원상가의 ⅔ 정도를 소유하고 있어 전체적인 관리운영을 맡고 있고, 나머지 ⅓은 소유권을 분양해서 소유주들이 저마다 다르고, 또 위층에 있는 아파트들에는 세입자들이 따로 있죠.
전체의 관리를 맡고 있는 대일건설에서 김지연 디렉터님과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런 전시와 같은 형태를 지속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결국 낙원상가에 위치한 한 공간을 전시장으로 내어주고 전시장 운영을 맡기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제주에서 같이 일을 했던 인연으로, 저도 함께 d/p 운영을 맡게 되었습니다.

ⓒ오창동
어떻게 낙원상가라는 곳에 전시장을 만드셨나 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d/p라고 하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선뜻 떠올리기가 어려운데, 무슨 뜻인가요?
처음 만들 때는 낙원상가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discrete / paradise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paradise는 낙원상가의 낙원을 뜻하고, discrete는 수학 용어인데 흩어지고 분산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낙원상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악기를 주로 판매했는데, 건물 안에 보면 다양하고 재미있는 공간들이 저마다 번호 호수를 가지고 흩어져있죠. 그래서 모여있지만 또 흩어져 있는 개별적인 낙원, 그런 것들이 기획자들이 만들어가야 할 지향점이 아닐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사실 처음 이름을 지을 때만 이렇게 생각했지, 말할 때마다 계속 바뀌어요. (웃음) 우리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는 Director’s Paradise라고 하기도 하고, 최근 하고 있는 전자음악 관련한 활동을 할때는 Disco Paradise나 Dance Paradise로 부르기도 하죠.
기획자를 위한 기획
정해두지 않으니 오히려 더 재미있고 많은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d/p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하는데요. d/p에서 만들어진 기획 중에 ‘d/p 기획지원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죠. 어떤 프로그램지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d/p 기획지원프로그램’은 전시기획 환경 개선과 전시기획 기회 확충을 위해 d/p에서 외부 큐레이터의 전시를 개최/지원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보통 공모를 7월에 시작해서 9월 쯤 서류 검토와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큐레이터를 선정하는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죠.
그렇게 선정된 기획자들과 내년 스케쥴을 함께 정해요. 저희도 d/p 자체 기획 전시가 있다보니 그에 맞추어서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각 기획자들께 전시 기간은 5주 정도 드리고 있습니다. 초청의 형태로 진행했던 첫 해를 포함해서 올해 3년 째 진행을 하고 있네요.
이 기획자 공모를 만들게 된 것은, ‘어떻게 하면 건강한 기획자의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획자’는 정말 기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엄청나게 제한되거나, 혹은 어떤 기관에 들어가야만 작업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대부분이거든요.
독립으로 활동할 때 작업을 할 수 있을만한 공간, 그리고 약간의 응원과 지지가 있으면 더 건강한 흐름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또 흩어져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들이 정말 ‘흩어져 있는 낙원’처럼 오가면서 유연한 플랫폼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오창동
굉장히 많은 기획자들이 공모에 지원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진행을 하시면서 어려움 같은 것도 있었나요?
김지연 디렉터님과 함께 서류를 보고 이야기를 듣는데, 선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더라고요. 저희에게 이런 것들을 다 제출해주시고 여기까지 와 주신 것들이 너무 감사하고 또 죄송하기도 한데, 그만큼 정말 기획자가 설 자리가 없구나 하는 생각도 한편으로 들었고요.
그래서 매해 선정팀의 수를 탄력럭으로 조정하고 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갖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기획자 공모를 통해 진행을 한 전시가 지금까지 7번이 되었는데, 최근에는 이만큼 하다보니 또 이게 루틴화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저희도 내부적으로 이런 흐름의 기획이 맞을까 하는 고민도 많이 들었고,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21년 공모에는 저희가 이전까지 선정했던 큐레이터들을 심사위원으로 모셨어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기획자가 기획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점인 것 같습니다. 저희 <중심잡지>에서도 여러 분들이 공간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었죠. d/p 공모에 선정되셨던 분들은 정말 자유롭게 기획하셨을 것 같은데요.
조주리 큐레이터님 같은 경우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가진 분이셨는데, 저희 d/p에서 진행하신 전시는 정말 하고 싶은 걸 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말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취향을 마음껏 풀어내시는 걸 보고, 저희가 지향했던 ‘기획자가 해보고 싶었던 것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가 내년부터 시도하려고 하는 것 중 하나는, 정기적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해요. 전시를 하고 나면 사실 피드백을 잘 못 받거든요. 작가도 물론 피드백이 중요하지만, 전시가 끝난 후에 전시의 레퍼런스, 작가, 작품의 관계들에 대해 묻고 답하는 리뷰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전에 선정되셨던 큐레이터들을 중심으로 모셔서 같이 이야기 나누고, 기록을 공적으로 남기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피드백의 기회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공적인 자리에서 리뷰를 받는 것은 때로는 솔직하지 못하거나, 받기 두려운 경우들이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대화로 풀 수 있는 것들이 그 안에 있어요. 정말로 솔직한 이야기들을 듣는 경험들을 쌓는 게 기획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런 경험이 지속된다면 서로 참조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생겨날 테고요.

이민지 ⓒ오창동
낙원상가 이야기
그럼 낙원상가 이야기로 좀 넘어가볼까 하는데요. 낙원상가와 관련하여 d/p에서 이루어진 프로젝트도 있었나요?
사실 저희는 전시 안에서 지역 자체의 이야기를 포함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그것을 전시로 직접적으로 풀지는 않지만, 조주리 큐레이터님의 전시처럼 낙원상가에서 헤비메탈에 대한 전시를 잭 블랙이라는 인물을 경유해서 풀어내는 작업은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제가 개인적으로 낙원상가에 대한 작업을 한 것은 오히려 d/p를 벗어나서 였어요.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진행하는 예술인 파견지원사업에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 파트너로 여기 낙원상가와 함께 사업에 참여했거든요.
이번에 파견지원사업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에서는 낙원상가의 폰트를 가지고 달력을 만들었어요. 낙원상가가 50년을 지나오면서 건물 안에 굉장히 다양한 글씨체들이 있거든요. 그 글씨체들을 <중심잡지>에서 ‘을지의 색’을 선정해서 싣고 계신 것처럼 모아본 거죠.
낙원상가 지하에는 시장이 있는데, 그런 상가들에서는 간판을 손으로 써서 붙여놓기도 해요. 시장에서부터 16층까지 붙어있는 숫자들을 다 뽑아서 그걸로 달력을 만들었어요. 굉장히 재미있었죠.
이 프로젝트는 세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건물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아라비아 숫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지만, 거기에 덮여진 글씨체, 색깔, 그것이 위치한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성들이 느껴진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김지연 디렉터님과 제가 별개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인데, 전자음악과 관련된 프로젝트예요. 낙원상가가 2013년도에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어요. 관련해서 50년 전부터 전자악기와 미디장비가 유통되었던 낙원상가의 역사를 정리해보는 프로젝트입니다.
전시로 풀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가 둘 다 전자음악에 관심이 많거든요. d/p에서 작년 11월에 DJ를 불러서 무선헤드폰을 쓰고 춤을 추는 파티를 진행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그런 낙원악기상가의 역사를 정리해보자고 시작했는데, 필요한 제반 지식이 많아 많이 애를 쓰고 있기도 합니다.

ⓒ오창동
말씀하신 전자음악 프로젝트는 정말 역사성에 대한 질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있는 을지로 역시도 오랜 시간 산업이 자리한 곳이라 동일한 질문을 저희가 계속 던지고 있기도 하거든요.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 해볼까 하는데요. 앞으로 어떤 것들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기획이라는 것을 하게 된지 햇수로 7~8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럼에도 아직까지 계속 붙잡고 있는 질문은, ‘어떤 것이 예술이 되어야 하고 어떤 것이 전시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에요.
왜 이것이 예술이어야 하는지, 혹은 왜 이것이 전시가 되어야 하는지 당위성을 찾는 과정에서 막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실 이 질문들은 바로 해결될 수 있는 질문들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질문들을 전시로 풀지, 혹은 앞으로의 삶 속에서 풀어나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이것들을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꼭 전시의 맥락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그랬을 때 훨씬 좋은 작품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이 작품이 왜 전시 안에 들어와야 되는가, 이런 고민을 해보아야 하는 거죠. 그런 질문을 갖고 작업들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d/p에서 기획되는 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었는데, 인터뷰를 통해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흥미로운 작업들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민지 ⓒ오창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