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쌓여가는 서사와 언어로서의 전시 | 임진호

들어가는 말


전시는 어떻게 말을 건넬까요? 전시장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보다보면, 전시란 단순히 작품을 공간에 배치해놓은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별 작품들이 건네는 이야기 말고도, 전시가 전시로서, 하나의 매체로서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가 분명히 존재하죠.


아웃사이트의 임진호 큐레이터는 전시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전시에는 단순히 공간을 점유하는 어떤 것들을 넘어선 맥락이 있고, 또 그것을 텍스트로 풀어냄으로써 그 맥락의 방향을 더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말이죠.


더불어 언어가 여러 가지 매체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했을 때, 우리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사적이고 내적인 경험들을 어떻게 공유 가능한 것으로 번역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함께 보실까요?



임진호 ©청두



새로운 경험을 직조하는 기획


안녕하세요. 오늘은 임진호 큐레이터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먼저 기획자의 일을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학부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어요. 처음에는 미술에 대한 막연한 관심으로 선택한 전공이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인도 미술사나 동아시아 불교 조각사, 회화사 같은 종교미술 수업들을 많이 찾아들었어요.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당시의 저는 ‘형상’을 보고 ‘형상’ 뒤에 숨어있는 레퍼런스들을 찾는 데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종교미술은 도상과 레퍼런스의 관계가 긴밀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거든요. 그 이어지는 레퍼런스들을 통해서 ‘형상’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적인 구조나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하나씩 추적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죠.


졸업하고 나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고미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유물보다는 좀 더 살아있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좀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술이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예술가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경험하는 방법을 고민했죠.


그러다가 로드 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 편입을 하게 되었어요. 이곳은 미국에 있는 미대 중에서도 좀 보수적인 편이라, 크래프트맨쉽(craftsmanship)에 대한 기준이 굉장히 엄격한 학교예요. 그런 기준에 맞추어 과제를 하는 게 잘 맞지 않았는지, 학교 바깥의 일을 찾기 위해 많이 돌아다니게 되었어요.


예를 들면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대지 미술 작업을 하는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작업이 지어지고 있는 현장의 트레일러에서 여름을 나기도 했고, 산타클라라 푸에블로 인디언 보호구역에 위치한 한 퍼머컬쳐(permaculture, 지속가능한 생활 방식) 연구소에서 지내며 인디언 전통의 생활 방식을 현대에 적용하는 실천을 함께하며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결국 두 번째 학부에서 하려고 했던 것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기회를 찾고 그 안에 몰입해서 새로운 경험을 직조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그것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나를 납득시키고 그 결과물을 제시하는 과정이 바로 ‘기획’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물론 기획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 다른 관점이나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내가 흥미를 갖고 계속해왔던 것이 바로 기획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기획을 좀 더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큐레이팅 석사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김상진 작가와 아웃사이트(out_site)를 오픈하게 되었죠.



©청두



아웃사이트와 더불어 OS라는 공간도 책임큐레이터로서 운영하고 계신데요. 이 두 공간은 어떻게 다른가요?


일단 공간의 생김새가 굉장히 다르죠. (웃음) 건축적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도 달라지고요. 아웃사이트가 좀 더 폐쇄적인 사각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OS는 여러 층에 걸쳐 나뉘어져 있고 실내외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편이에요. 계단과 복도, 테라스와 바깥 풍경이 내부와 은근히 연결되어 있거든요.


아웃사이트는 공간의 존재감이 묵직한 편이에요. 작가님들도 종종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중심의 H빔이나 문, 천장의 배관 등을 보면 공간의 캐릭터가 강하죠. 그에 비해 OS는 좀 더 유연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 두 번째 공간을 만들 때 운영팀이 논의를 했던 내용이 있어요. 아웃사이트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조금 더 단단한 구조와 맥락을 갖고 있는 전시들을 위주로 운영했다면, OS는 좀 더 열려있고 확장되는, 실험적인 방향으로 전시가 만들어지길 원했죠. 그래서 OS는 개인전, 신진 작가 같은 키워드로 운영이 되었고요.


올해 초부터는 OS에서 공간적인 문제로 전시를 하지 않고 있는데, OS가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레거시들을 공간과 함께 어떻게 매듭지을지 이야기하고 있어요. OS의 정체성이 공간에 매여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또 어떤 형식으로든 유연하게 포맷을 실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지금은 온라인이나 기타 공간을 통한 실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안과 밖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아웃사이트(out_site)


OS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플렉서블한 활동들이 기대됩니다. 제가 찾아본 내용에 의하면, 전시를 준비하시는 데 있어 리서치를 주로 전략으로 두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리서치에 있어 특별한 방법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흥미를 가졌던 지점과도 연결되는데, 시각문화와 텍스트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면서 현상이나 형상을 둘러싼 맥락을 드러내고 서사를 쌓아올리는 과정이 리서치이자 전시를 만드는 과정인 것 같아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과정을 생각해보면, 하나로 딱 떨어지는 어떤 주제나 키워드에서 시작하지는 않고요. 뉴스나 인스타그램, 틱톡, 인터넷 커뮤니티, 브이로그, 뮤직비디오, 영화, 만화, 이런 넓은 범주에서 우리가 시각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대하면서, “요즘 이런 느낌이 희한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그걸 동시대의 분위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보통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이런 흐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에서 시작하게 되죠. 그런 뭉툭한 동시대성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작업들을 보러다니거나 서치하다보면 작업들이 리서치의 방향을 좁혀주거나 전환해서 재설정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어요.


특히 작가님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작업에 참조하는 텍스트에 대해서 리드를 얻을 때도 있고, 텍스트가 또 다른 작업으로 리드를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사회적인 현상이나 텍스트, 작업들이 계속해서 단서를 주고 받으며 이어져서 확장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아웃사이트(out_site)라는 이름과도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요. 아웃사이트가 ‘바깥’이라는 말로 번역된다고 할 때, 미술계의 제도화된 중심과 새로운 움직임으로 포착되는 날 것의 외부, 이 관계성을 참조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또 미술로 정의되는 것들과 아직 미술로 정의되지 않은 것들, 가령 유튜브나 SNS에서 보이는 시각 현상이나 텍스트들이 미술과 맺는 관계성을 참조한다는 것을 아웃사이트라는 이름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왼쪽부터 뀨, 몰라, 임진호 ©청두



계속해서 이어지는 리서치로서 작업을 해오고 계신데, 전시에서 관객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드는 방법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시와 함께 제시하는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새는 텍스트가 다소 올드한 매체가 된 것도 있고, 때로 텍스트가 거리를 더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그럼에도 기획과 공간의 입장에서는 전시를 제시할 때, 작가들이 보여주는 시각적인 현상들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 같이 볼 수 있도록 병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공간에 펼쳐진 시각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두 가지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갖고 있어요.


작가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펼쳐놓은 시각적인 세계가 또 다른 방식으로 정리가 되는, 다른 관점을 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런 매력들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어서 텍스트 생산을 계속 고집하고 있어요.


최근 관심을 갖고 계신 미술계의 이슈나 키워드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전시는 계속되는 흐름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이전 전시가 끝나고 다음 전시를 준비할 때 완전히 다른 주제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전의 전시에서 완벽하게 납득하지 못했던 것, 혹은 아직 비어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으로 들어가면서 다음 리서치가 이어지게 되거든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돌아보면 항상 ‘몸’이라는 키워드가 있었고, 이 ‘몸’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언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미묘하게 부딪히거나 섞이는 지점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은 주관과 객관 사이의 어떤 간극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텐데요.


주관적인 영역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표상 가능한 척도로 도식화하거나 매끄럽게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보면, 개인과 개인 혹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심연을 잇는 언어, 이성이라는 놀라운 구조를 설계해낸 것이 인간의 가장 놀라운 성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동시에 비가능의 영역에서 논의되지 못하던 것들이 있죠. 사적인 영역들, 내적인 경험들, 쾌락, 고통, 인상, 육감같은 이름으로 뭉툭하게 이야기되는 것들인데, 여기서 나의 경험과 당신의 경험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맞춰볼 수 없다는 지점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이성적인 척도, 언어라는 논리적인 시스템이 완전무결한 매체가 아니라 여러 번역 툴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보면, 주관의 경험을 어떻게 공유 가능한 형태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청두



주관을 공유하는 매체로서의 고민


관심을 가지고 해오셨던 작업 중에 기억나는 작업이 있으시다면요?


저에게 가장 챌린징 했던 전시로 작년의 ⟪Love Bug⟫라는 영상 전시가 있었어요. 팬데믹 때문에 초반에 많은 것들이 취소되고 그동안 해왔던 흐름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을 해야 했거든요.


사실 팬데믹이라는 눈 앞의 국면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진 않았지만 이 기획을 단기간에 해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도 코로나고, 우리가 처해있는,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보아야 하는 상황도 코로나잖아요.


전시는 7월 오픈이었는데, 수정된 전시의 방향이 잡힌 3월, 4월에 몇 가지 제한들이 있었어요. 전시를 위해 배송이 오거나 제작, 설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들. 그래서 영상만 있는 전시를 어떻게 흥미롭게 풀 수 있을지, 그 안에서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팬데믹 안에서의 단절과 거리, 연결과 같은 키워드를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번외편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었죠.


되돌아보니까,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던 것 같기도 해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격리와 단절의 관점에서 작업을 들여다봤었거든요.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도 우리는 너무나도 연결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스스로를 고립시키곤 했었어요.


그 거리를 매개하기 위해서 또 다른 어떤 연결을 시도하고, 연결이 다시 단절을 매개하고. 사실 이 연결의 기술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 언어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이런 스펙트럼을 묶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마지막으로, 공간을 운영하고 전시를 준비하시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으시다면요?


전시를 만들면서 저희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텍스트 생산을 하는 것, 전시 파트너로서 기능을 하는 것이에요. 단지 공간을 열어주고 여기에서 전시를 하우징하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전시를, 작업을, 주제를 들여다보고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웃사이트가 중시하는 방향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또 공간의 기획들이 단순히 작품들이 디스플레이되는 투명한 매체가 아니라, 전시라는 하나의 작업으로써 제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전시를 만들고 있습니다.


공간에서 펼쳐질 다양한 이야기들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그러면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진호 ©청두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