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큐레이션 | 중심잡지 x 권태현
들어가는 말
이번 주에는 권태현 큐레이터를 만나 시간성과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권태현 큐레이터는 미술비평가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작업들을 기획해 온 기획자이기도 합니다. 권태현 큐레이터는 을지로의 예지동과 세운상가를 주제로 만든 작업을 통해 ‘다른 시간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그리고 그 다름을 감각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특히 이번 인터뷰에서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예술작업에서 커뮤니티 아트가 왜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커뮤니티 아트를 통해 무엇을 만들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무엇이 공공을 불/가능하게 할지, 같이 한번 들어볼까요?

권태현 ⓒ오창동
<A Mode>, 커뮤니티 아트의 불/가능성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미술비평과 기획을 하고 있는 권태현이라고 합니다. 원래 학부 때에는 문화연구를 전공했고, 석사 때에는 미술이론을 공부했습니다. 석사 때 운이 좋게도 글쓰기로 먼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에 기획 등의 일들도 같이 하게 되었어요.
해오셨던 일들을 보면 비평가로서 글을 쓰시기도 하지만, 직접 기획을 하시거나 작업을 하신 경우도 많은데요. 스스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시는지요?
사실 복잡한 문제인데요. 두 가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한다거나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모두 미술 작업에서 정치적인 국면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통합된 방향성을 가진 작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는 글을 쓰는 사람, 혹은 전시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국면을 발굴해낼 수 있을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죠.

권태현 ⓒ오창동
같은 방향성에서 오늘 이야기를 풀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심잡지>는 을지로에서 일어나는 예술 작업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권태현 선생님께서는 실제로 을지로를 주제로 작업을 한 경험도 있으시죠?
네, 최근 제 포트폴리오를 다시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일관적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을지로와 관련해서 했던 첫 프로젝트가 을지로 예지동에서 했던 <A Mode>입니다.
을지로는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개발을 둘러싼 문제들이 있는 곳인데요. 예지동을 고른 것은 이곳이 재개발이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방식과 조금 다르게 접근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지동은 카메라와 시계들이 있는 공간이에요. 일명 ‘시계 골목’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명품 시계 같은 것을 수리할 때도 많이 찾는 곳이죠. 이러한 점에서 출발하여 재개발 문제를 시간과 공간을 감각하는 문제로 접근해보고자 했어요.
그런 접근을 통해 도시라는 공간이 얼마나 다양한 시간이 겹쳐져 있는 곳인지 보여줄 수 있고, 또한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프로젝트의 제목 ‘A Mode’는 카메라의 조리개 우선 모드를 뜻합니다. 예지동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리서치를 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조리개 우선 모드로 사진을 찍는 것 같았거든요.
조리개라는 공간이 고정되어 있으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셔터스피드, 즉 시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다양한 방식의 시간을 개입시켜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도시에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결코 균일하지 않고, 시간 자체가 가진 다원성을 예지동을 통해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예술에서의 정치적 국면이라는 것, 재개발 이슈를 구체적인 정치적인 사안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로 바꾸어서 근본적으로 이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프로젝트였던 것이죠.
말씀하신 대로 을지로는 여전히 재개발의 이슈로 첨예하게 갈등을 빚고 있는 곳입니다. 일부 지역은 이미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고요. 이런 맥락에서 지역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작업이 아닌데요. 실제로 재개발 이슈 때문에 꾸준히 활동하시는 분들도 있죠.
커뮤니티 아트를 실제로 하고 계신 분들에 대해서는 정말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했던 작업에서는 커뮤니티 아트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는 그 지역에서 단지 1년 정도 관계 맺으면서 리서치를 진행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작업을 커뮤니티 아트로 이름짓거나, 작업이 을지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예술이라고 보는 것은 기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업을 해나가면서 지역의 주민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생되는 것들이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예술가들이 지역에 완전히 융화될 수 있다거나 이 작업이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티 아트일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예술과 지역의 괴리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덮어버리거나 혹은 우리가 지역을 100% 이해해서 프로젝트를 만들었다는 기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어요. 최종적으로 나온 결과물도 커뮤니티와 예술가들이 같이 발전하는 계기나, 근본적으로 존재했던 다름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죠.

예지동 시계골목 입구 <A Mode> 작품 설치 모습 / 왼쪽 작품 강문식 <00:00>,
오른쪽 작품 구동희 <로만손 & 로가디스> ⓒ홍철기
어떤 괴리가 있었나요?
예지동의 작업에서는 실제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는데요. 예지동 입구 양쪽에 있는 시계탑을 포장해서 일종의 퍼블릭 아트로 만드는 작업을 했었거든요. 이 작업을 위해서 지역 주민분들과 다 합의를 진행했고,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설치작업을 유지하기로 했었어요.
그렇게 굉장히 많은 공을 들여 설치를 했는데, 이게 갈등의 포인트가 됐습니다. 알고 보니 상인회도 하나가 아니었던 거죠. 분명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지역 커뮤니티 내에서 설치 작업이 마음에 안 들었던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이 문제 제기를 하니까 저희가 알 수 없었던, 원래 지역에 내재되어 있었던 갈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작품을 철수해야만 했고, 심지어 예산도 이미 다 소화한 상태에서 제가 개인 비용을 들여서 철거를 진행해야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그 어떤 커뮤니티도 단일한 입장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몸소 배우는 계기였습니다.
커뮤니티 자체가 애초에 분열을 가지고 있고, 예술가들이 거기에 개입했을 때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괴리, 적대, 경합의 국면들이 오히려 커뮤니티 아트에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커뮤니티 아트를 진행할 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이 지역에서 진정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그 오만함을 버리는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커뮤니티에 잠재되어 있는 적대와 불화들을 미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을지로라는 공간
프로젝트에서 시간성을 강조하셨는데요. 예지동에는 어떤 시간성들이 교차하고 있다고 보신 건가요?
재개발이라는 것 자체가 ‘여기는 너무 낙후된 지역이니까 새롭게 만들어야 해’라는 것에서 시작되잖아요. ‘낙후’라는 말 자체가 시간성의 문제를 상징한다고 보거든요. 새롭게 만드는 것이 사람들에게도 좋고, 도시 생태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죠. 2020년에는 2020년에 맞는 건축적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재개발 문제로 연결되는데요.
이 문제를 단지 새로운 건물을 올리는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감각의 문제로 보고, 재개발 문제를 미학적으로 다시 분석해보자는 것이 진행했던 프로젝트였어요. 사실 재개발에 찬성, 혹은 반대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복잡한 문제거든요. 리서치를 진행하면서도 이 프로젝트를 재개발 찬반의 문제로 수렴시키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재개발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 ‘다른 시간을 가진 공간’이 지금의 구조에서 어떤 위상에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죠.
우리는 이것을 쉽게 감각하지 못합니다. 서울이라는 공간, 2020년이라는 하나의 시간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 이 공간 안에는 균일한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아요. 공간 안에 얽혀있는 다른 시간들을 감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바로 <A Mode> 프로젝트의 요점이었습니다.

권태현 ⓒ오창동
그런 의미에서 을지로 전체를 하나의 큰 상징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시 소개글에도 잠시 언급하셨던 ‘빈티지’의 개념이 있는데, 최근의 을지로와도 굉장히 관련이 깊은 주제이기도 하죠.
사실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빈티지는 다른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바꾸어버려요. 마치 그것을 특별한 어떤 것인 양 대상화해서 소비해버리는 것이죠.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고 있는 ‘레트로 붐’은 사실 글로벌한 흐름이기도 해요.
슈퍼히어로물이 블록버스터 영화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대표적이고, 음악에서도 중요한 경향이죠. 70, 80년대 콘텐츠들이 다시 만들어져서 대중에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것들이 동시대에 존재하는 방식이 오로지 소비로 모아지고 있는 현상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레트로, 혹은 빈티지라고 했을 때 거기에 로컬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사실 정말 그 지역에 계신 분들을 소비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 장소에 새롭게 들어간 젊은 사람들이 만든 카페의 분위기가 레트로가 되는 것뿐이지, 그것을 가리켜 현장의 다른 시간들이 중첩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른 시간의 모습들을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현상은 단지 미학적인, 혹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역과 거기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이나 활동가들 사이에서 갈등이 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해요. 그래서 이러한 소비의 행태가 큰 문제라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커뮤니티 아트를 하고 있는 분들도 계세요. 그분들의 경우 제가 고민하던 문제들까지 이미 경험적으로 다 알고 계시고, 지역에서 드러나는 커뮤니티의 불가능성도 알고 계시죠.
커뮤니티라는 것의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거기에서 이미 그 커뮤니티의 일부분이 되어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 그런 분들의 활동에 대한 존경은 동시에 당연히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을지로라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사실 누구든 을지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을지로 사람들도 을지로에 대해서 알 수 없어요. 하나의 을지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외부의 예술가들이 투사하는 것 자체가 문제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을지로 안의 다름, 이 공간 자체가 굉장히 이질적인 것들로 뒤섞여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을지로, 하면 철공소와 세운상가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사실 을지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엄청나게 상업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대기업 빌딩들이 자리한 비즈니스 지역이기도 하거든요.
또한 식당이나 다방 등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을지로가 무엇이다, 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에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권태현 ⓒ오창동
미술에서의 ‘공공’의 가능성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전시는 공공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전시라고 들었습니다.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광장/조각/내기>라는 프로젝트인데요. 제가 생각보다 일관된 프로젝트를 해왔다고 느꼈던 것이, <A Mode>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해온 것, 그리고 내년에 준비하고 있는 모빌리티 프로젝트까지 모두 다른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거든요.
<광장/조각/내기>의 경우는 공공미술에 대한 비판을 작업으로 풀어낸 프로젝트입니다. p-p-p.site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작업이 전개가 되는데,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지도가 있고 여기저기에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죠.
마치 전형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안내 웹사이트 형식을 띠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설치되어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오히려 순간적이거나, 사적인, 혹은 퍼포먼스적인 방식의 작업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강은희 작가는 주차되어 있는 차로 관객을 초대합니다. 차는 공공에 드러나 있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사적인 공간으로 변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더 다양한 것을 다루고 있지만, 그 형식 자체만으로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에서 공공성을 탐구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죠.
여기서도 비슷한 주제가 도출되는데, 우리가 공공미술이라고 부를 때에 과연 그 ‘공공’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죠. 하나의 공공은 없고, 공공이라는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균열들, 공공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장소의 불가능성, 커뮤니티의 불가능성과 같은 결에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공공미술이라는 것이 가능하려면, 공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질문을 던져야 공공미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미술이 너무 쉽게 장르화되는 것은 문제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주현욱, <어떤 부분집합은 전체집합에 구멍을 낸다(하절기 모드)>
공공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그리고 공공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의 문제는 한국의 동시대 예술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질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막대한 공공의 기금을 통해서 수많은 작업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공공성을 ‘이룩’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말장난같기는 하지만, 지금 진행 중인 <광장/조각/내기>를 많은 분들과 함께 만들면서 ‘공공미술의 불가능성이 공공미술의 가능성이다’라는 말이 나왔었어요.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이 세계 안에서 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역할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멈춰 세워서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공미술이라는 것을 멈춰 세우고 공공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작업을 펼쳐내는 것이 현대미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공공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발화하고, 장르화되어 마구 치닫고 있는 공공미술을 멈춰 세워서 공공의 불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죠. 공공미술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공공미술이라는 것 자체를 멈춰세우는 차원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을지로와 시간성, 공공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인터뷰였습니다.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권태현 ⓒ오창동

ⓒ오창동
권태현(큐레이터, 미술비평) 7000eichen@gmail.com
미술이론과 문화연구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미술계에서 활동하지만 미술 안쪽에 있는 미술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 미술과 정치가 서로에게 만들어 내는 틈과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A mode>
기획: 권태현, 염인화 / 참여: 김상진, 김양우, 구동희, 조은지, 주현욱, 최성록, 김상돈, 강문식
<광장/조각/내기>
기획: 권태현, 최황 / 참여: 강은희, 김재민이, 일상의실천, 주현욱, 전솔비, 차지량, 최태훈, 최황, 허호정